깔깔깔깔

인간이 아닌 것에의 두려움. 본문

정리되지않아.

인간이 아닌 것에의 두려움.

귤고양이 2014. 10. 7. 12:02

좀비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비주얼이 혐오스럽고, 둔탁하기 그지없는 몸짓에 의사소통의 여지가 전혀 없음은

정말이지 돌아보기조차 싫은 대상이니까.

 

티비에서 한다.

중간부터 본다.

어, 나쁘지 않다.

월드워 z.

 

우선 차분한 흐름이 좋았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배우인 브레드피트조차 정말 소박한 인간처럼 보였으니까.

 

탁월한 성찰이라 생각되었다.

나를 해하는 기존의 그것이 나를 보호하고 생존케 하는 무언가가 된다는 설정.

 

좀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 정신과 의사(A)는 착취 본능과도 연결지어 이야기를 하고,

어떤 실존 치료 관련 학자(B)는 비실재와도 연결짓는다.

 

그래 둘 다의 말이 조금씩은 맞아떨어진다고도 생각한다.

 

좀비가 표상하는 건 B의 말대로 삶과 죽음이 없는 공간, 비실재 NCR의 시공을 의미한다고 여길 수 있겠다.

좀더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는 무의식의 세계.

그렇다면 인간에게 왜 삶과 죽음이 없는 그 시공이 두려움의 대상인 좀비로 형상화된 것일까.

아마도 인간의 문명화가 낳은 '뿌리로부터의 소외'가 자신의 뿌리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둔갑시킨 것이겠지.

그 두려움을 타인이나 외부의 대상에게 투사했을 때 그마만큼의 두려움도 함께 생성되는 것일테고.

 

사실 무의식으로의 여행은 목숨을 걸고 해야하는 그것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의식 세계의 그것과 동떨어져 있는 매우 먼 그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다만 우리가 살아온 궤적이 그것과는 너무 멀게 되어 더욱 힘들어져버린 건 맞는 것 같다.

대칭의 인류학이었나. 일본 철학가의 그 책이 생각난다.

자본주의와 문명화가 급속도로 비대칭의 발전을 낳았다는 류의 썰.

그렇다면 인류 의식의 비대칭을 보상하기 위해 집단무의식은 거대한 흐름을 응축하고 있을테니

아마도 그러한 것들이 좀비 등의 형상으로 출현하는 게 아닐까 섯부른 짐작을 해본다.

(물론 작금의 비대칭적 흐름에도 거대한 시스템적 의도는 분명히 있으리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그건 나중에 생각 정리를 할... 틈이 있으려나. ;;)

 

영화는 탁월했다.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것,

자신을 가장 위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스스로의 광기일 수도 있으며 가장 약한 점일 수도 있겠다.

흔히 말하는 컴플렉스나 융이 말하는 컴플렉스 모두일 수 있겠다.

('인간이 컴플렉스를 지니는 게 아니라 컴플렉스가 인간을 지닌다.')

스스로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무의식의 세계와 공존해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아직은 서로 싸우고 물어뜯을지언정 공존은 가능해진다.

어떻게?

자기 자신의 혐오지점을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융은 인간이 지닌 네 가지의 기능들 중 열등 기능을 무의식에 쳐박아 놓고 열등하지 않은 한 두개의 기능에 의존하여 생을 살다 중년을 넘어서면서 묻어놓은 열등 기능이 통합되기 위해 의식에 출몰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이 함께 그 힘을 나타낸다는 류의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그것과 연관시켜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결국 영화 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휘청거리는 토템.

의식에서 무의식으로의 유연한 왕래.

이를 위한 삶의 태도 유지.

그러다보면 좀비가 좀비이나 지금의 좀비는 아닌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나 서는 날이 있겠지.

암, 그렇겠지.

 

그렇다면, 다시금 질문은 남게 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리되지않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다는 것.  (0) 2017.10.29
혼자를 살아냄  (0) 2017.10.25
단 한번도.  (0) 2017.10.23
이유를 굳이 찾자면.  (0) 2017.10.18
My job.  (0) 2017.06.08